별이 흐르는 강(2015)/별강 로그(관계)
기억의 공유 (유월)
션님
2015. 9. 29. 18:48
“얼굴 좀 펴시지요.”
투박한 찻잔을 쥔 옥분이 한 구석에 드러누운 제 오라비를 보며 지나가듯이 툭 말했다. 하지만 마들가리는 꼼짝도 않고 돌아누워 있었다. 그녀는 그의 그런 모습이 익숙했는지 금세 신경을 끄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입에 머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풀에 지친 마들가리가 퍽 기운이 없는 소리를 작게 냈다.
“데려올 것을 그랬나?”
“유월이 거절했으면요?”
그렇지. 그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들가리는 유월이 참 마음에 들었다. 어린 누이와 똑 닮은 검은 눈동자는 물론이고, 의젓한 모습도 무엇에 그리 경계를 하는지는 몰라도 그의 눈에는 썩 나쁘지 않았다. 만일 남동생이 있었다면 딱 이런 느낌일까, 얼마간의 동행은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게 하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서로의 일이 다하여 길에서 만난 그대로 길에서 헤어졌다만, 그 어린 용을 혼자 다니게 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다만 옥분이와의 이상한 기류가 말이지. 마들가리는 긴 머리를 배배 꼬았다. 어린 아이들의 모래 장난 같은 느낌 같기도 했고, 또 내버려두면 한없이 깊어질 연정 같기도 했다. 마냥 또래 친구처럼 놀다가도 가끔 유월의 짙은 눈이 누이를 물끄러미 향할 때면 ‘우리 옥분이는 안 된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 좁은 땅에서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요.”
그래, 그럴 것이다. 마들가리는 눈을 감았다. 용의 인생은 길었다. 100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인간의 덧없는 삶과는 달리 용은 충분히 대명을 열 두 바퀴도 돌 수 있었다. 달은 눈을 한 번 깜빡이는데 한 달이 걸리지 않는가. 그들의 삶도 그러했다.
그는 왼쪽 얼굴을 덮은 채 반짝이던 비늘을 떠올렸다.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그것과, 그 아래로도 차마 숨기지 못하던 소년의 앳된 얼굴도 가만히 떠올렸다. 창을 열어놔 한들거리는 바람이 그의 긴 머리를 흩트렸다. 바람을 타고 주변의 모든 생명체가 느껴졌다. 만일 유월이 이 근처에 온다면 바로 알 수 있으니 마중을 나갈 수도 있다.
“그래, 내가 너무 감상에 젖어 있었구나.”
“오라버니도 퍽 유월을 맘에 들어 하셨나보옵니다.”
“내가?”
그는 고집스레 볼을 부풀렸다. 그러자 가까이 온 옥분이 철썩 마들가리의 넓적다리를 내리쳤다.
“아야!”
“사내는 모름지기 솔직한 것이 최고이옵니다.”
마들가리는 뭐라 구시렁대고 툴툴대다 입을 쭉 내밀었다. 한순간이나마 “그런 말도 하다니, 이제 네가 시집을 갈 정도로 자랐나보구나.” 라고 얘기하려던 자신의 입을 꾸욱 닫고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만났을 때 유월이 여전히 의젓하다면 모를까, 아직은 어림도 없다. 제 눈에는 여전히 누이가 세상에서 가장 참하고 예쁜 용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안 된다.”
“예?”
“아니, 아니다.”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니 말이다, 유월이 망나니처럼 자랄 수도 있는 노릇이고 옥분이 평생 혼자 살 수도 있기 마련이니.
그 와중에도 누이가 짝을 찾는 생각은 아예 하고 싶지 않은 그였다.
*
“오랜만이지.”
찬 밤기운이 코를 찌른다. 내내 기억 저 편으로 밀어뒀던 소년이 어느새 사내가 되어 옆에서 잔을 받았다. 묘하지. 참으로 묘해. 어떻게 그대가 또 나를 만났을까? 세상이 참으로 좁아. 그래, 그간 무얼 하며 지냈소? 마들가리가 씁쓸하게 병을 기울였다. 술은 일종의 뇌물이었다. 유월이 아까 자신을 소개하던 여울의 옆에 서서 다른 사냥꾼들의 인사를 받을 때처럼, 지금도 아무 말도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유월은 한 입에 맑은 술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 입으로 2년 간 그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한 이름을, 그 안부를 물었다.
마들가리는 이미 차있던 잔을 혀 위로 부었다.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실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선명하게 그릴 수 있는 유월의 얼굴은 10년 전의 그 얼굴이다. 하지만 유월은 제 고유의 기운 그대로 그의 눈높이와 얼추 맞는 덩치가 되어 마들가리의 앞에 나타났다. 어떤 얼굴일까, 어떻게 자랐을까. 형체는 알 수 있어도 또렷한 색이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유월이 재차 물었다. 마들가리는 또 말없이 잔을 채웠다. 다른 이들에게 장난스레 얘기하듯 제 누이가 먼저 꼬까신을 신고 갔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한때의 기억을 함께 할 수 있는, 제 누이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지인에게 갖출 예의였다.
어디부터 할까, 마들가리는 이제야 진정으로 제 이름을 찾은 이야기를 띄엄띄엄 시작했다. 연한 빛이 돌던 녹두색 눈은 하얗게 바랜 채 허공을 향했다. 제 어머니가, 그리고 제 누이가 아끼던 머리장식이 짝을 잃은 채 바람에 흔들렸다. 유월은 아마 그것이 두 쪽일 때 어떤 모양이었는가를 기억할 것이다.
마들가리는 그런 것을 함께 이야기할 누군가가 생긴 것이 행복했다. 누이에 대한 것이 저만이 꾸는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달이 셀 수 없이 눈을 깜빡이고 마른 눈물을 흘리는 사이에, 언젠가는 누군가와 만나길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동시에 변한 모든 것을 낱낱이 고할 수 있는 것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눈을 덮는 앞머리가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느껴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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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더딘 사랑> 이라는 시에서 빌려온 표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