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님 2015. 9. 29. 18:54



 그날의 자리는 밤이 한참 더 깊어서야, 어디서 부드럽게 들려오던 귀뚜라미 소리마저 새벽이슬로 사라질 즈음 파했다. 저 산 너머부터 파랗게 물든 공기 사이로 두 남자가 비틀거리며 입구의 발을 부딪쳤다. 

 차가운 바람이 달은 볼을 스치자 한 남자는 좀 정신이 드는 듯했다. 곧 지난밤의 걷힌 기운을 고스란히 담은 눈이 제 빛을 찾고는, 일행의 거의 감긴 눈꺼풀에 닿았다. 그는 저만 한 일행을 부축하여 골목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 아침




 3. 

 오시(午時) 쯤의 내리쬐는 햇살에 마들가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마셨지.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는 꽤나 잘 마시는 편이다. 제 주량 이상으로 마시는 일도 드물뿐더러 상당히 천천히 잔을 비우는 탓에 파한 자리에 혼자 남기가 다반사였다. 그러니까, 이게 대체 얼마만의 일이더라. 


 솔직한 심정으로는 반가운 옛 친구와 대화의 안줏거리로 술을 마신 셈이다. 본디 그의 성정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즐기기는 했어도, 또는 그렇게 보이더라도 남들보다 항상 배로 정신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모처럼의 소중한 친구와 어쩌면−아마도−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술자리였으니 평소보다 기꺼운 속이었을 터이다. 

 또 동시에 그의 갈피를 못 잡는 마음이 낳은 허함을 달래는 것도 있었을 게다. 반가운가? 씁쓸한가? 혹은 보고 싶지 않은가? 이 자리를 피해야 하는가? 그는 늘 답이 없는 수수께끼들을 즐겼지만 이번만은 영 힘이 들었다. 그 사이사이 짧은 간극이 침묵으로 얼굴을 드미는 순간에 저절로 잔을 들었으니 그 다음날의 두통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는 물을 갈구하는 속을 달래고 기억을 되짚었다. 유월과 서로 부축하며 돌아와 펴지도 않은 자리에 풀썩 쓰러진 것과, 그 전에 나누던 대화들을. 




 1. 
 빈 병이 상 위를 점점 채워 나갔다. 마들가리는 무거운 팔을 들어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유월은 작게 딸꾹질을 하며 마른안주를 손안에서 굴렸다.  

 “…있지,”
 “그래, 있지.”
 “너는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평소와는 달리 조금 풀린 목소리가 기운 없이 한숨처럼 나왔다. 그 말에 마들가리의 손에서 잔이 미끄러질 뻔했다. 그는 손을 흥건히 적신 술을 등 뒤로 털어 버렸다. 다행히 유월은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마들가리는 보이지 않는 눈을 꾹 감았다. 

 “너희 남매는 말이야….”

 푸우, 단내 나는 숨이 잠깐 말을 끊었다. 

 “그나마, 내 가족이 되어 줬어….”

 그렇게 외롭게 살면서 처음으로 가족처럼 느낀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이제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남은 한 사람까지 그렇게 된다면, ……. 유월이 웅얼거렸다. 그러지 말아줘, 너까지 죽지는 말아. 
 마들가리는 막 상에 올라온 병을 연거푸 부었다. 그는 순간 유월에게 무슨 말실수는 하지 않았나, 유월이 제 생각을 알고 저러나 했다. 그는 차마 뭐라 답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말없이 잔만 기울였다. 차가운 액체가 헛구역질을 누르고 불처럼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한참 바닥을 노려보며 웅얼거리던 유월이 갑자기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러고 보니 무덤은.”
 “으응?”
 “무덤은 있을 거 아니야. 어디에 있어?”

 누구의 무덤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들가리는 타버린 집 근처 양지바른 곳에 도도록하게 솟은 누이의 잠자리를 떠올렸다. 유월은 성묘라도 올 셈인가.

 “암, 있고말고.” 
 “그럼….”
 “…자네가 있으니 참 좋군. 이렇게 내 누이의 무덤을 물어보는 사람도 다 있고.”

 마들가리는 또 한 잔을 비웠다. 

 “그거 알고 있나? 내가 사냥꾼이 되고 누이에 대해 말한 건 여울과 마루 앞에서 뿐이야.”
 “왜?”
 “뭐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얘기하고 다니나. 다 아픈 사람들인데 괜한 동정을 사기는 싫어서.”
 “…….”
 “그래서 여울과 마루는 내심 이런 쪽으로는 신경을 써주는 모양이더라고…. 그럴 것 같아서 말을 아끼려고 한 건데 말이야. 면접에서 숨길 수는 없지 않나.”
 “다른 말로 둘러댈 수도 있잖아.”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네.”

 여울 앞에서는 거짓말을 잘 못 하겠던 탓도 물론 있지만 그가 거짓말을 피하는 탓도 있었다. 유월은 안주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술술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마들가리를 생각해 봤다. 그리고는 그 안 움직이던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그래, 안 어울리네.”
 
 마들가리는 “그래,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쳤다. 그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2.
 “얼굴을 만져 봐도 되나?”

 난데없는 그 말에 가여운 유월은 그만 아까운 술을 뱉을 뻔했다. 이런, 조심하게 그려. 원흉인 자는 도리어 태연했다. 

 “…얼굴은 왜?”
 “자네가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해서.”

 살짝 풀린 눈이 솔직하게 답했다. 나기를 장님으로 태어난 자들은 손으로 사람의 얼굴을 가늠하고 생김새를 대충 짐작한다고 들었다. 그에게는 아직 ‘여기가 눈이다’ ‘볼이 매끈하다’ 정도로밖에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아마 어릴 적의 얼굴을 속으로 그릴 수 있는 유월은 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유월의 자란 모습이 내심 궁금했다. 
 유월은 조금 떨떠름한 기색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누가 자기 몸에 손을 대는 일이 얼마만인지 햇수로도 세기 벅찬 탓이다. 그것도 가끔 닿는 손이나 팔도 아니고−무려 얼굴인 것이다. 그는 조금 흐른 술을 입가에서 닦아내고는 긴장하여 뻣뻣하게 목을 세우고 허락했다. 더운 숨을 뱉는 얼굴과는 반대로 찬 손가락이 조심스레 양 볼을 감쌌다. 

 이런 얼굴이구나, 마들가리는 신기한 듯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아, 비늘. 두 남매에게는 또렷하게 보이지 않던 비늘이 유월의 얼굴에는 유독 뚜렷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지.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새카맣고 반짝이던 비늘은 여전히 눈가에서 뺨으로 내려왔다. 그는 용의 흔적을 쓰다듬고는 조심스레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만져 봤다. 그 순하고 귀엽던 눈이 이제는 바싹 얼어 있구나. 아직 통통하던 볼이 이제는 말라서 딱딱했다. “젖살….” 그는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말이야,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안 웃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양 입꼬리를 엄지로 늘려 보며 불만스레 말했다. 
 솔직히 그간 유월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속으로는 어린 유월을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키가 큰 남자와 어린 아이의 모습 사이의 괴리감이, 손가락 아래에서 조금씩 메워져 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주 오래전의−버릇처럼 정수리 부근을 쓰다듬고는 손을 뗐다.

 “이제 청년이라고 해도 믿겠군.”

 어린 동생이 잘 자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서 이렇게 쑥 커서는, 자신과 키도 견줄 기세였으니. 그는 새삼 유월이 자신들과 헤어져 무얼 했는지 궁금해졌다. 아니, 사실은 전부터−달봉에서 헤어진 후부터− 궁금했다. 말하기 곤란할까 차마 묻지 않고 있었는데 왠지 오늘은 물어도 괜찮을 성 싶었다. 
 그는 유월이 그간 여행을 다닌 곳에 대해 물었다. 달봉에서 헤어진 후로 어디를 갔는지, 어떻게 살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곤란하면 답하지 않아도 좋아.” 그는 재빨리 덧붙였다. 유월은 별 거 없었다며 입을 열었다. 그들의 앞에 다시 잔이 차올랐다. 




 3.
 오시(午時) 쯤의 내리쬐는 햇살에 유월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마셨지.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는 꽤나 잘 마시는 편이다. 그의 주량이 셀뿐더러 그 이상으로 마시는 일도 드문 탓에 파한 자리에 혼자 남기가 다반사였다. 그러니까, 이게 대체 얼마만의 일이더라.

 그는 어제의 기억을 되짚었다. 평소와 달리 진탕 취해서 마들가리에게 죽지 말라고 애원을 한 것부터(−왜 그런 소리를 했지,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쪽팔려, 그렇게 취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다니. 아. …아아아−) 마들가리가 저의 얼굴을 만진 거라거나, 자신의 여행담과 동굴 이야기, 그리고……. 

 유월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꽤나 취한 상태였지만,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들가리는 정작 중요한 것에는 단 하나도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덤은 어디에 있는 거야? 그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은 해 주지 않았다. …그래, 그건 그럴 수도 있다. 무덤을 가르쳐주기 싫었거나, 아니면 아직 말을 꺼내기 벅차거나.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평소의 그라면 죽지 말라는 말에 무거운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갖은 농을 던졌을 테다. 그는 그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던 마들가리를 떠올렸다. 왜 거기서 대답을 하지 않았지? 그게 확신이 있고 없고 할 문제인가. 마들가리는 그때 어떤 얼굴이었지, 아쉽게도 그건 보지 못했다.

 뒤늦게 찝찝한 기분이 그를 감쌌다. 




 4. 
 한참 거슬러 올라가던 마들가리는, 제가 별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냉수를 들이켰다. 
 그는 차마 유월에게 무덤을 알려줄 수 없었다. 만약, 언젠가 그가 찾아와서는 마들가리를 발견한다면…. 유월의 주정이 귓가에 쟁쟁했다.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이제야 말하지만, 그는 사실 이 계획을 조금 망설이기도 했다. 남겨지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그는 훌쩍 떠나기도 미안했다. 하지만 그가 ‘떠나는’ 것을 사람들이 모른다면. 그건 완벽하지 않은가. 마들가리는 차마 그 속죄를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누이를 죽인 무력한 자신이 끔찍하게 미웠다. 

 그리고 그만큼 유월에게 감사했다. 
 항상 꿈에서는 그 지독한 밤이 반복됐다. 그 끝이 없는 악몽은 그에게 잊지 말라는 듯 끊임없이 그의 죄를 상기시켜 줬다. 
그런데 유월을 만나고는, 가끔이지만 그 옛날 셋이 다니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유월과 누이가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바닷바람을 맞던 모습이. 문득 이 남매를 가리켜 가족이라고 생각했다며 말하던 모습이 덩달아 스쳤다. 
 내 아우가 되어 준, 상냥하던, 상냥한 아이. 

 마들가리는 그만 팔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