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컴퍼니(2016)/로그

터닝 포인트 (with. 공지환)

션님 2016. 12. 19. 03:46




 퇴근, 퇴근, 두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 로비를 가로질렀다. 오늘은 참 운수도 좋다. 일도 일찍 끝나고, 회의도 없고, 신고도 없어서 아무 데도 안 나갔다. 이대로 집에 가는 길에 치킨이나 사서 갈까, 오피스텔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맥주 할인도 하던데. 두온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마냥 즐거워 콧노래를 불렀다. 수고하십니다, 들뜬 목소리로 경비에게 인사하고 회전문도 괜시리 한 바퀴 더 돌았다.

 이제 슬슬 여름은 다 갔는지 해는 벌써 떨어졌다. 어둑어둑해지면서 바람도 제법 쌀쌀하다. 두온은 양복 자켓을 추스르며 몸을 한 번 떨었다. 역시 치킨보다는 삼겹살이나 먹을까, 코  끝에 스치는 바람에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러던 중 두온의 시선이 어디 한 구석에 콕, 하고 박혔다. 어라, 종로 한복판에, 그것도 이렇게 회사만 잔뜩 있는 데에 웬 어린애가 있었다. 노란 병아리 가방을 맨 여자아이는 와인색 니트를 입었지만 그래도 추운지 하얀 원피스 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 볼도 빨갛고, 여기 애가 있을 만한 데는 아닌데. 두온은 주위를 휘 둘러봤다. 딱히 보호자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미아? 아니면 누굴 기다리나? 두온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아이에게 다가갔다.

 “저기, 누구 기다리니?”

 아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얀 토끼 머리끈으로 머리를 반쯤 묶은 아이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듯 가방끈을 꼭 쥐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그는 바짝 얼어있는 아이가 안쓰러워 무릎을 굽혀 쭈그리고 앉았다.

 “아저씨는 여기, 요 회사 다니는 사람인데. 혹시 누구 찾는 거면 아저씨가 불러다 줄까?”
 “아빠가 모르는 사람은 조심하랬어요.”

 가정교육을 잘 받았군! 교과서에 나올 법한 올바른 괴한 대처법에 두온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는 흘깃 아이의 니트에 달린 이름표를 확인했다. 공유아 [민들레반]. 
 그는 머리를 굴렸다. 아빠라. 이 회사에 다니는 공 씨에, 똑 부러지는 딸이라면 생각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이목구비도 많이 닮았고, 아니, 쌍꺼풀 없는 큰 눈은 거의 틀에서 찍어낸 듯이 똑같았다.

 “너, 공지환 대리님 딸 맞지?”
 “어? 우리 아빠 알아요?”
 “그럼! 가끔 술도 마시러 가는데.”

 단둘이 마시는 건 아니고 사고팀 회식이지만. 그는 그 말은 쏙 빼고 능청스레 말했다. 아빠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아이의 경계가 급속도로 풀렸다. 그래, 두온은 아까 내려오는 길에 본, 다들 퇴근할 시간에 계단을 반대로 뛰어 올라가던 지환을 떠올렸다. 애도 밖에 냅두고 뭔가 가지러 간 거면 금방 내려올 테지. 두온은 양복 자켓을 벗어서 아이의 어깨에 걸쳐줬다.

 “아빠 올 때까지만 아저씨 옷 덮고 있어.”
 “감…감사합니다.”
 “고맙지? 암, 그치. 왜냐하면 아저씨 지금 무지 춥거든….”

 두온은 굽히고 있느라 비명을 지르던 무릎을 펴고 한번 기지개를 한 다음, 어깨를 움츠렸다. 과장되게 이를 딱딱거리며 떠는 소리를 내자 유아가 킥킥 웃었다.

 “다 큰 어른이 뭐가 추워요?”
 “아니, 춥지 그럼! 어른도 너네랑 똑같이 배고프고 춥고 졸리고 한다! 방구도 뀐다!”
 “에- 더러워-”
 “아저씨 방구는 덜 더럽다-”

 덜 더러운 방구가 어딨어요! 까르르 웃으며 하는 말에 두온은 유치하게 혀를 내밀었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회사가 일반인 출입 금지라지만 로비정도에 있게 하지. 이 추운 날에 괜찮은 거야? 그는 속으로 꿍얼거렸다. 일처리가 꼼꼼한 건 좋은데, 사람이 이렇게 박하게 살아. 융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건 아닌지 염려도 됐다. 어차피 경비도 있는데 잠깐 데리고 들어갈까, 두온은 턱을 쓸었다.
그때, 유아가 반짝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아빠!”

 아, 정말 금방 오셨구나?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지환의 반가운 얼굴은커녕 다급한 발소리 뒤에 “넌 뭐야?!” 하는 큰 소리, 그리고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주먹이 날아와 두온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퍽! 소리가 나며 고개가 홱 꺾였다.

 “어, 두온 씨?!”

 동료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32세 애 아빠와 난데없이 뺨을 맞은 38세 수상해 보이는 아저씨의 시선이 한차례 당황스럽게 얽혔다. 운수가 좋기는 개뿔이! 두온은 찔끔 나는 눈물에 볼을 감싸 쥐었다. 



 *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아니에요. 제가 봐도 제가 좀 수상하게 있었죠.”

 지환은 빨갛게 된 두온의 뺨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평소라면 치료해준다고 당장 손부터 뻗었을 텐데, 깜짝 놀라 토끼눈을 뜨고 지켜보는 유아가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괜찮아요, 약 바르면 낫겠죠.”
 “그, 내일도 아프면 꼭 …….”
 “어휴, 됐습니다. 뭘 또 출근하자마자 ……하려고 그래요?”

 두온은 대충, 아, 애한테 능력을 말을 안 했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아이가 이렇게 어리면 어디 가서 “우리 아빠는 슈퍼맨보다 짱이다!” 하고 외칠 수도 있는 노릇이니 말이다.

 “근데 대리님, 날도 추운데 애 좀 잠깐 데리고 들어가시지. 1층에라도 있으면 될 텐데 애 볼이 빨갛더라고요.”
 “네?”

 지환이 깜짝 놀라며 유아를 쳐다봤다. 그러자 유아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지환의 시선을 피했다.

 “유아야, 아빠가 잠깐만 그대로 있으라고 했잖아? 밖으로 나왔어?”
 “그, 으, …….”

 유아는 아빠랑 꼭 닮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곧 손을 꼼지락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애가 멋대로 나온 거였구나. 두온은 아까 속으로 꿍얼거린 걸 재빨리 삭삭 맘속에서 지워버렸다. 지환은 그제야 아이가 걸치고 있는 자켓이 눈에 들어왔는지 두온과 유아를 번갈아보고는, 더더욱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두온은 그 꼴이 퍽 신기했다. 몇 년을 본 사람인데 서류 내놓으라고 옆에 서있는 얼굴과 지금의 모습은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딸 걱정, 두온에 대한 미안함 등이 범벅이 된 그 표정에서 평소의 무뚝뚝함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정말로.

 “애가 딱 부러져서 별 걱정은 안 하셔도 되겠던데요? 제가 뭐 물어봤더니 모르는 사람이랑은 말 안 한다고 고개 홱 돌리길래, 저거 덮어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나 몰라요.”

 그래도 감기는 좀 걱정이니까 이제 날도 추운데 애 좀 따숩게 입혀가지고 가시는 게 좋겠어요, 아님 위에 가서 따끈한 물이라도 좀 갖다 주거나…. 두온은 길게 말을 늘이며 유아에게 찡끗 눈짓을 쳤다. 유아가 방긋 웃으며 이를 보였다. 아이고,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더니, 저렇게 귀여운데 안 하고 배기나. 두온은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는 해프닝으로 두온은 유아와의 만남이 마무리가 되는 줄만 알았다. ‘나중에 또 보자’라고 말을 하며 헤어지기는 했지만 사실 또 언제 보겠는가. 요컨대 그는, 지환이 먼저 유아를 맡길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이 말이다.
 두온은 굳이 1팀까지 찾아와 그를 불러낸 지환을 보고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예?”
 “정말로 죄송합니다. 염치가 없는 건 알지만,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지환이 절박하게 물었다. 평소에는 가사 도우미가 지환의 퇴근 때까지 아이를 받아주고 돌봤는데 이 주에 휴가를 냈다. 그래서 어제도 일찍 퇴근해서 어린이집에 간 것인데, 방금 아이가 아프다고 일찍 집에 보내야겠다고 연락이 왔다. 초조하게 시간을 봤지만 그런다고 잡힌 회의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대리급 이상, 빠질 수도 없는 중요한 회의라 그는 이렇게 생각해도 안 되고 저렇게 생각해도 안 돼서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두온을 찾은 것이다. 만약 안 된다고 하면—아마 안 되겠지만, 지환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앞이 막막했다.

 “그러죠 뭐.”
 “네, 어쩔 수 없. 네?”
 “근데 제가 어린이집 주소를 모르는데, 지도만 좀 찍어주실래요?”

 두온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핸드폰을 건넸다. 아니, 애가 아프다는데 오죽하면 나한테까지 왔겠어. 그는 어제 삭삭 지웠던 지환에 대한 생각(“사람이 이렇게 박하게 살아…”)을 아주 조금만 다시 불러왔다.

 “이렇게 급한 일이면 그렇게 안 미안해하셔도 괜찮아요. 애가 아프다는데 제가 뭐 호통을 치겠습니까, 귀찮다고 가버리겠습니까? …아니, 설마 절 그렇게 생각하시고 계셨던 건?!”
 “아닙니다! 아니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지환은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두온은 여기에서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찍힌 표시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어린이집에 미리 연락도 부탁했다. ‘어제처럼 의심 받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자 지환의 얼굴이 좀 어두워졌다. 아이고, 내가 말실수를. 두온은 황급히 농담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다행히 퇴근 시간이네요. 하던 것만 정리하고 갈 테니까 걱정 마시고.”

 찰칵, 화면을 스샷찍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외우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또 연락처를 받아둔 두온은 잔뜩 긴장했던 지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얼마 안 돼 소란스러운 소리가 파티션 너머까지 들렸다. 

 ‘아, 맨날 회의 늦게 끝내면 직원들 다 사직서 냅니다?! 오늘은 2팀 팀장님 말꼬리 좀 그만 잡으라고 민원 들어가면 저라고 생각하시죠!’ 
 ‘왜 또 시비야! 지난 주 보고서나 빨리 마무리하고 가!’ 
 ‘말 안 하셔도 저 퇴근 완전 잘 하거든요! 오늘의 서류는 내일로 미루는 것이 미덕인…….’ 
 ‘…!….’ 




+



다들 나이차가 워낙 많이 나는 가운데에서

그나마 한두온한테 베프에 가까웠던? 다른거 없이 그냥 제일 편한 친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