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기다리던 날이 더 이상 축제가 아니게 된 날 밤, 어슴푸레하게 동쪽 하늘이 밝아오는데도 누구도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까만큼 심각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지만 오히려 생각에 빠진 침묵은 그보다 무거웠다. ‘눈 좀 붙이지들 그러나.’ 마들가리가 얘기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일 뿐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생각할 것이 많겠지. 아마 지금 상태로는 누워도 편히 자지 못할 게다. 하지만 피곤한 상태로 정신의 끈만 간신히 잡고 있자니 자꾸 이상한 생각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대체 왜 괴물들은 축제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나타난 것일까. 오늘 맞닥뜨린 놈들이 평소 나오던 괴물들과 다른 이유는 또 뭘까. 그래도 우리가 있어서 피해가 덜하긴 했군.
그런데 우리는 왜 수도에 왔더라? 몇 사람들의 말대로 사냥꾼이 가는 곳에 괴물이 따라오는 것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들가리의 손바닥이 불을 뿜었다. 철썩! 스스로의 볼을 세게 친 그는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파리가 앉아서. 그가 애처롭게 변명했다. 다들 실없이 웃었다.
이런 생각까지 드는 것을 보니 정말로 잘 시간이 되었나보다.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마루와 호빈이 오는 것은 보고 자려고 했는데 그건 무리인 모양이다.
“나는 이제 그만,”
“윤슬님이 깨어나셨습니다.”
“…슬이에게 가보겠소.”
갑작스런 발소리와 동시에 안쪽에서 들리는 운혜의 말에 마들가리는 빙글 돌며 말을 끝맺었다. 와, 자연스러웠어요. 산다화가 박수를 쳤다.
*
슬쩍 고개를 들이밀자 멍하니 앉아있던 슬이 인기척에 놀라 이쪽을 봤다. 마들가리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피곤해서 그마저도 잘 나오지 않았다. 에고, 내가 잘 시간에 네가 깨는구나. 그는 농을 던지며 슬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슬이 일어나며 떨어진 물수건을 주워 대야에 던졌다. 찰박 하는 소리가 났다.
“그래, 어디까지 기억이 나더냐?”
묻고 싶은 게 많겠지, 마들가리는 가만히 앉아 물었다. 슬은 주저하다가, ‘한 남자가 다리를 먹혔다’고 답했다. 그 순간 마들가리는 믿지도 않는 신께 감사를 드렸다. 그 후는 기억하지 않는 게 좋지. 암. 그의 안도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슬이 조심스레 질문을 꺼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어떻게 되기는. 네가 괴물들을 다 처리하고 내가 널 데려왔지.”
“…왠지 뒤통수가 아파요.”
“그건, 음.”
마들가리는 잠깐 주저하다가 허리춤에 찬 호리병을 들어 보였다. 요 녀석이랑 인사를 좀 했을 게야. 슬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제가 또 그런 건가요?”
“아니, 아주 잘 해줬단다. 오래 버텨준 덕분에 더 큰 피해자도 낳지 않았고, 으응.”
“하지만 정신을 잃었잖아요.”
“슬아, 네가 무던히 노력한 걸 내 모를까?”
“정말, 죄송해요.”
슬이 말을 삼켰다. 마들가리는 이 순간만큼 앞이 안 보이는 것이 아쉬운 때가 없다. 슬이 어떤 얼굴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달래는 일에는 재주가 없는데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면 더더욱 힘들었다. 분명 기운이 없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말없이 슬의 움켜쥔 손을 꼭 쥐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손등 위로 소나기가 손을 적셨다. 울고 있었구나, 톡톡 떨어지는 물방울에 마들가리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슬도 제 눈물에 놀랐는지 손을 빼내어 이불로 눈물을 훔쳤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연신 말하며 슬이 눈가를 짓눌렀다. 폭주해서 죄송하다는 건지, 울어서 죄송하다는 건지. 마들가리는 손등에 떨어진 눈물을 가만히 문질렀다. 그는 이렇게 복잡한 감정을 읽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말없이 긴 소매를 들어 슬의 얼굴을 닦아냈다. 피곤한지 까슬한 살이 일어났다. 마들가리는 아이의 볼을 두어 번 다독였다.
“이상한 일이지. 왜 아가는 나한테 죄송하다는 말밖에 안 할까. 난 고마운 일투성인데.”
그렇게 얘기하며 마들가리는 손가락을 들어 하나씩 꼽았다.
“생각해 보련, 네가 와주지 않았으면 난 혼자 심심하게 있었을 텐데 축제 때 말벗이 되어줬지. 괴물들을 맡아줘서 사람들도 다 대피시켰지. 나도 너도 이렇게 무사히 다친 데 없이 돌아와 대화도 나눌 수 있고.”
아하, 그리고 내 호리병이 얼마나 단단한지도 몸소 알려주고 말이야. 이건 단단한 호리병을 준 산다화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그가 심각하게 말했다.
“하여간에 나는 네가 내게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무얼 그리 사과하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제가 이성을 잃고….”
“네 힘이 닿지 않는 일더러 책임을 묻는 사람은 없지.”
아니, 오히려 너에게 괴물을 맡기고 네 옆을 떠난 내 실수지. 그는 주변의 이목이니 피해자니 신경 쓰지 않고 처음부터 슬과 함께 싸웠다면 슬이 끈을 놓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이 조금 남아있었다. 다른 방법이 있었을 텐데 아이에게 너무 모든 걸 맡기지 않았나 싶은.
그러자 슬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가리 아저씨가 없었으면 전 진작 정신을 놨을 거예요. 그리고 절 여기까지 데려오시고….”
“호오, 정말인가?”
“그럼요.”
“그렇다면 죄송하단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쪽이 더 좋은데 말이야, 마들가리가 웃으며 말했다. 슬은 잠깐 고민하다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어떤 말이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이 작게 입을 웅얼거렸다.
“고맙, 습니다….”
“아무렴, 나야말로 고맙구나.”
마들가리는 칭찬이라도 하듯 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흠뻑 젖었던 머리카락은 이제 다 말라 손바닥 아래에서 부스스 흩어졌다. 미안하다고 우는 것보다는 역시 이쪽이 더 좋다. 위로를 받아야 할 아이가 왜 다 끌어안으려고 하누,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슬그머니 소매에서 약과를 꺼내 슬의 손에 쥐어줬다.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마들가리도 능력이 폭주하는 경우는 한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용은 제 능력에 죽어버렸으니 사실상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어디 조언을 구할 데도 마땅찮고 말이다.
“옳지, 슬아. 명상 같은 걸 해보는 건 어떠냐?”
“명상을요?”
“좀 더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으면 능력 다룰 때도 좋지 않나 싶어서 말이지.”
그렇다고 저 어디 들어가서 목탁을 두들기자는 건 아니고, 그냥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거나 하는 시간을 매일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밖으로 발산하는 것도 좋지만 안이 제대로 다져져야 침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냥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떨까? 마들가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좋은… 것 같아요.”
“그래, 의무감을 느낄 필요는 없고. 그냥 편안하게 있는 시간을 좀 늘려보자꾸나.”
마들가리는 슬이 여전히 쥐고 있는 약과를 느끼고 슬쩍 웃었다.
“날이 완전히 밝으면 강가에 두고 온 음식들도 찾으러 갈까.”
그걸 신경 쓰고 계셨어요? 슬이 작게 웃었다. 암, 네가 그렇게 한 아름 사왔는데 당연하지. 과일은 상했을 지도 모르겠구나. 마들가리는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날이 완전히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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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님 리퀘 [슬이 달래며 명상을 하자고 권하는 마들가리]였습니다!
슬아 이 아저씨 달래는 재주가 눈곱만치도 없으니 뚝 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오래 걸린 것에 비해 영 만족스럽지가 않네요..... 88 이리저리 바꿔보다가 포기했습니다..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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