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에는 내내 비가 내렸다.
마들가리는 발에 밟히는 것들을 하나 집어 들었다. 꽃이었다. -어라, 낙엽이 아니라? 어쩐지 바스락대는 소리 대신에 축축하고 부드러운, 하지만 흙은 아닌 느낌이 든다 싶었다. 갑작스런 찬바람에 우수수 떨어졌나. 그러고 보니 여기도, 저기도, 손닿는 곳은 온통 줄기가 꺾인 꽃 투성이다. 마들가리는 옷자락을 접어 쪼그리고 앉았다. 꽤 익숙한 풍경인데. 최근은 아니고 상당히 오래된…….
마들가리는 습기를 머금은 꽃을 손으로 비볐다. 산에서 날 리 없는 바다 냄새가 저편에서 밀려왔다. 그는 바람에 묻어나는 짠 냄새를 따라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더라.
*
“이렇게 엮으면 되옵니까?”
누이가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마들가리는 어깨 너머로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옳지, 그걸 묶거라. 그리 말하는 그의 손도 온통 꽃향기로 가득했다.
간밤에 바람이 많이 몰아친다 했더니 바닷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는 갓 피운 꽃들이 가득 융단을 깔고 누웠다. 그리고 마들가리는 꽃밭을 지나치지 못하는 누이를 말리지 못했다. 그래, 이 꽃들로 무얼 하려고? 그가 묻자 누이가 한 아름 꽃을 안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머리장식을 만들고 싶다 하였다. 다행히 그건 마들가리가 할 줄 아는 범주 내에 있었다. 예전에 화관 만드는 법을 배우길 잘했지, 그렇기에 저잣거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꽃밭에서 쭈그리고 꽃을 만지는 다 큰 남자의 모습이 연출된 것이다.
마들가리는 한때 잠깐 만나던 여성이 알려주던 대로 몇 번 줄기를 꼬고 당겼다. 예전만큼은 안 되는구나, 옆에서 제대로 알려주던 연인이 없는 탓에 기억 속에 남아있던 것에 한참 못 미치는 엉성한 화관이 완성되었다. 누이는 그래도 제법 손을 잘 움직였다. 오히려 마들가리보다도 야무지게 만들고 있었는걸.
마들가리는 마지막 매듭을 꾹 누르고 누이의 머리 위에 하얀 꽃들이 수를 놓은 왕관을 올렸다. 하지만 그 화관은 목걸이마냥 슥 아래로 빠져나갔다. 너무 크게 만들었나? 머쓱하게 뒷목을 긁자 누이는 그것도 좋다고 배시시 웃더니, 저가 다 만든 화관을 들어올렸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에 사뿐히 가을꽃이 올라왔다.
“이제 다 됐어?”
뒤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이와 마들가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유월도 만들어줄까요?”
“그대도 하나 만들어줄까?”
유월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충 그 의미는 '저 바보 남매.'정도가 아닐까. 하기야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쓰고 다니기엔 눈에 많이 띄는 장식이었다. 유월은 그런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보였고. 하지만 마들가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혼자 안 쓰고 있으면 외롭지 않겠소.”
아니, 별로. 유월은 생각했다. 하지만 마들가리는 아까 한번 실패해서 버려뒀던 무더기를 집어 들었다. 자, 이렇게, 그는 너무 일찍 끊어져서 차마 머리에 못 쓸 것이라 남겨뒀던 것의 양 끝을 뒤늦게 이어 유월에게 건넸다. 손목에는 넉넉하게 들어갈 정도였다.
“이거라도 괜찮소?”
아니, 별로. 유월은 다시 생각했지만 꼭 닮은 두 얼굴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에 결국 받아들었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더 좋은 걸로 만들어주겠소, 마들가리가 신이 나서 말했다. 아마 진심으로 유월이 이(런)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갈까? 마들가리는 누이의 손을 잡았다. 내내 꽃을 만졌더니 옮은 촉촉한 물기가 손에서도 배어나왔다.
*
안 돼, 안 되겠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 마들가리는 손아래에서 파스스 부서지는 것들에 눈물을 훔쳤다.
거의 10년 만에 잡는 거였다. 그때도 잘 만드는 편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눈도 보이지 않았으니 제대로 될 리가 있나. 손끝의 감각에 의존해서 만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그는 무릎 위에 떨어졌을 잔해들을 휘휘 털어냈다. 옛날 생각이 난 김에 추억에 젖어 만들던 화관은 그 이름을 붙이기도 안쓰러운 자태로 널브러졌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그 말은 아무래도 영영 추억 속에 남겨둬야 할 성 싶었다.
어느덧 냉기를 품은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열심히 뭐라도 만들어보려던 사이에 해가 진 모양이다. 마들가리는 그새 차가워진 손을 소매 사이로 넣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오겠노라 했는데 어영부영 또 늦어버렸다. 으으, 한 소리 안 들으면 좋겠는데. 그는 찌뿌등해진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유월에게 뭐라도 사다줄까, 생각하며 비탈길을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는 다시 꽃밭으로 달려왔다.
*
유월은 갑자기 작게 울며 문 앞을 서성이는 고양이의 움직임에 멈칫 장죽을 집어넣었다. 내내 서로 있으나 마나 신경도 안 쓰던 둘이지만 마들가리가 오는 때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저 녀석만큼 확실한 신호는 없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발소리가 가까워지고는 곧 대문이 열렸다. 한 손으로는 옷자락을 말아 쥐고,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던 마들가리가 고양이를 발로 장난스레 건드린 다음 유월을 향해 웃었다.
“다녀왔소.”
“늦었어.”
“해가 지는 줄 몰랐지 뭐야.”
마들가리는 한 손을 펼치고 스스로의 눈앞에서 붕붕 흔들었다. ‘그치? 아무 것도 안 보인다네.’ 대충 그런 뜻이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해 지기 전에 온다고 말이나 말면, 유월은 뚱하니 입을 내밀었다.
“거기 든 건 뭐야?”
유월은 마들가리가 옷자락에 담아 그러쥐고 온 것을 가리켰다. 마들가리는 씩 웃고는 보따리처럼 만 것을 열었다. 그리고는 높이 하늘을 향해 천을 튕기자 하얗고 분홍빛이 도는 것들이 솟구쳤다. 한 아름, 뜯어지고 줄기가 끊어진 꽃들이 팔락거리며 눈처럼 떨어지자 그것을 잡겠다고 고양이가 앞발을 실룩였다. 마들가리는 혹시나 묻었을까 머리를 휘휘 털어내고는 유월의 옆으로 와 자리를 잡았다. 웬 꽃이냐고 입을 떼기도 전에 마들가리가 먼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예쁘지 않소?”
…아니, 별로. 유월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저 뒷산에서 발견했는데, 어차피 꺾인 아이들이고 내일이면 다 썩을 것 같아서 그대에게 보여주려 가져왔지. 어떻소? 마들가리가 마치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 들떠서 유월의 옆에 앉는 통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게 생긴 것 두세 송이 정도는 골라내서 말릴 생각이야, 나중에 책 사이에 껴놔도 괜찮고 장식으로 써도 좋고… 마들가리는 기쁜 듯이 말했다. 유월은 제 눈에는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이는 꽃들, 솔직히 말하자면 집 안에 들어온 쓰레기를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그의 눈에는 저걸 가져오느라 군데군데 옷에 밴 듯한 꽃물이 더 신경 쓰였다. 그는 옆에 놓인 마들가리의 손을 잡고 코 아래에 댔다. 숨을 들이쉬자 꽃과 풀 내가 물씬 들어왔다.
“얼마나 만지다 온 거야.”
“꽤 됐지 아마, 냄새가 심하오?”
마들가리는 뜨끔해서 물었다. 사실 아까 화관을 만들려고 오래 만지고 있기는 했다. 유월은 냄새에 무척 예민해서, 가끔은 없는 사이에 고양이랑 조금만 놀아도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냄새가 난다고 싫어했다. 마들가리는 씻고 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유월은 펄럭이며 사라진 옷자락과, 마당에서 꽃 사이로 뒹구는 고양이를 번갈아 봤다. 그러던 중 유월의 눈에 이상한 것들이 들어왔다. 축축하게 빗물에 젖어서 축 처진 꽃잎들 중에는 서로 묶여서 매듭지어진 것들도 여럿 보였다. 이건 왜 이런 꼴이야, 유월은 몸을 굽혀 꽃 무더기를 손으로 헤집었다. 이걸 보니 뭔가 생각이 날 것도 같고. 최근은 아니고 상당히 오래된…… …무슨 상관이람. 그는 빠르게 생각을 접었다.
유월은 여러 꽃들을 이리저리 뒤집어보고는 허리를 폈다. 그의 손에는 두 송이의 꽃이 들려 있었다. 모양이 썩 예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나마 꽃잎이 온전한 걸로 세 줄기 골라 마루에 올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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