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과님 미션에서 이어짐
“그래, 그 모자 안에는 아무래도 구멍이 뚫렸는가 보구만.”
“아니에요. 들어서 보여줬는데 아무 것도 없었어요.
“호오? 그건 흥미가 돋는….”
가만히 앉아 담소를 두런두런 나누던 마들가리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숨을 푹 쉬었다. 왜 그러세요? 슬이 당황하여 물었다. 마들가리는 애꿎은 하늘만 노려봤다. 지금쯤이면 거의 별이 흐르는 강이 머리 위로 성큼 다가왔을 것이다. 오늘은 분명 즐거운 날이거늘, 몸 상태가 그리 안 좋은 것도 아니며 고뿔이 든 것도 아닌데 이 기분 나쁜 예감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찝찝한 기운이 계속해서 온몸을 훑었다.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소름이 등 뒤를 훑는 느낌이 연신 들었다. 아까 설핏 지나간 냄새가 다시 신경을 찔렀다.
잠시만, 쉬이. 마들가리는 검지손가락을 들었다. 바로 둔덕 위, 저잣거리의 소란이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무언가 이상하군.”
“네?”
설은 생명의 기운을 잘 느끼지 못한다. 마들가리 또한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은 잘 보지 못한다. 하지만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자니 이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웅성대는 소리, 다들 기쁨에 차 떠들며 연주하던 소리들이 뚝 끊어지고 비명에 가까운 내지름이 들렸다.
“수도에 놈들이 나타난 일이 있던가?”
“아뇨, 없는데…요.”
슬도 낌새를 챘는지 우뚝 멈췄다. 이제는 모른 척 할래야 할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하고, 고약한 냄새가 스멀스멀 강가로 내려왔다.
“…음식들은 잠깐 치워두지.”
이제는 마들가리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머리 바로 위에, 혼잡한 거리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쫓아서 괴물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마들가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위치가 좋지 않다. 물을 다루는 둘에게는 천혜의 무기고지만, 그만큼 기력을 자제 못하고 낭비할 수도 있다. 게다가 여차 잘못하여 슬이 폭주라도 한다면…. 강물이 전부 사람들을 덮칠 지도 모른다. 마들가리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우선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저쪽에서 여기로 올 길을 막는 것이 급선무다. 그는 슬의 손을 꼭 잡았다.
“슬아, 내 말을 들으련. 나는 지금부터 다른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일단 몰아내고 오마. 명심하렴. 네가 쓸 수 있는 물이 많다 해서 과하게 쓰면 네가 감당을 못할게야.”
과유불급이라는 말을 기억해라, 아가야. 그가 다급하게 말하자 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보자꾸나. 둘은 급히 둔덕을 올랐다.
이건 정말 최악이구나! 마들가리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보통의 괴물들과 달리 크기가 인간만한 놈들이 우글우글했다. 모양이 특출나지 않은 놈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잘 구별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구경거리가 났다고 저 멀리서 구경꾼도 있는데다가 한 할아버지는 축제 공연인 줄 알고 박수를 치고 있었다. 괴물은 물러가라며 돌을 던지는 사람까지 있다.
슬은 팔을 크게 들어 강물 한 줄기를 들어냈다. 쿵, 어느새 난잡하게 언 물줄기가 아낙의 팔을 씹던 괴물을 내리찍었다. 놈이 짓이겨지며 더러운 점액질이 사방으로 튀었다. 사람들의 비명이 더 커졌다. 그 틈을 타 마들가리는 사람들의 등을 밀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백날 돌팔매를 해봤자 놈의 눈에는 그들이 12첩반상으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슬이 흘끗 눈짓을 했다. 빨리 사람들을 좀 치우라는 뜻이지, 마들가리는 버럭 고함을 쳤다.
“저 치들은 평범한 공격이 통하지 않으니,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제발 좀 도망 좀 치시오!”
사냥꾼이랑 괴물이야!
마들가리가 찬 견장을 본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소란, 비명, 사람들이 주춤거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용기를 가지기에 충분했으나 그 만용은 한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하면 끝이 난다. 돌을 마구잡이로 던지던 사람들이 하나둘 무기를 떨어뜨리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마들가리는 흘끗 뒤를 돌아봤다. 몇 사람과 슬, 괴물 여럿이 엉켜있었다. 마들가리도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인지 판단이 안 섰다. 하지만 슬이 다른 사람들보로 도망치라고 큰 소리를 내는 일은 힘들 것이요, 이 이상의 피해를 늘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평소 싸우던 놈들과는 달리 개체수가 많기는 해도 덩치가 작으니까, 어떻게든 슬이 정신을 잡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는 소란스러운 저잣거리에서 가만히 손을 모았다.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를 잡지 않고 최대한으로 안개를 만들었다. 강에서 빌려온 물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는 그 안개들을 골목마다 차곡차곡 쌓았다. 구름같이 몰려드는 안개들은 다른 사람들이 오지 않게 길을 막고, 시야를 가릴 것이다. 후, 그는 땀을 훔쳤다.
으아아악―!!
누군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우득, 뼈가 인위적으로 뜯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슬의 쪽이다. 오, 제기랄. 그는 재빨리 강둑으로 달렸다.
마들가리는 달리면서도 이 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한 남자가 다리를 뜯겼는지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아까 소리를 지른 것은 아마 그 남자겠지, 그리고 그 많던 괴물은 간데없고 남은 것은 온통 끈적하고 징그러운 시체뿐이고. 가운데에 아까의 배시시 웃던 아이는 간데없이 고통스럽게 머리를 뜯는 슬이가 있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다가도 저 남자가 다치는 걸 보면서 폭주한 것이겠지. 별이 흐르는 강이 요동치며 끓었다가, 마구 공중으로 치솟았다. 마들가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슬아?”
그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불렀다. 그 소리에 슬이 고개를 들었다. 오옳지, 아직 정신이 있구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정도라면 심각한 상황이지만, 그의 목소리에 반응을 한다는 것은 아직 괜찮을 지도 모른다. 마들가리는 기뻐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괴물.”
슬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의 뒤로 꽁꽁 언 물이 한 줄기 올라왔다. 비록 마들가리의 눈에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슬이 호의적인 얼굴은 아닐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괜찮을 지도 모르기는, 완전히 정신을 놓았구나.
슬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음 조각을 마들가리에게 내리 꽂았다. 쯧, 짧게 혀를 찬 그는 재빨리 슬이 만든 얼음조각을 다시 물로 만들었다. 허공에서 잠깐 꿈틀대던 물줄기가 팍 하고 터져나갔다. 약간의 알갱이가 섞인 폭포가 그들의 위로 쏟아졌다. 슬이 싫은 소리를 내며 몸을 숙이고 얼굴을 가렸다. 지금이다! 마들가리는 때를 놓치지 않고 호리병을 들어 슬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슬의 몸이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마구 요동치며 끓던 강이 한 순간에 잠잠해졌다.
“…휴우.”
마들가리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큰일 날 뻔 했군, 마들가리는 눈을 감았다. 주변에 슬이 죽인 괴물들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왜 갑자기 수도에 나타난 거지? 사람이 많은 곳이 좋아서? 그런 거라면 진작 수도는 습격을 당했어야 하지 않나. 게다가 왜 평소와 달리 크기도 작고 몰려나온 것일까. 설마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 건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달렸다.
그는 풀밭에 볼을 대고 쓰러진 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자. 생각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는 힘겹게 슬을 업었다. 정신을 잃은 아이는 평소보다 배로 무거웠다. 그래도 슬이 작아서 다행이지…. 그는 아까부터 유지하고 있던 안개 쪽에 힘을 풀었다. 나가는 길에 누군가를 만나면 여기 사람이 쓰러져 있으니 의원을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또… 강가에 있는 음식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해야지. 그는 등에 업은 아이가 숨을 고롱고롱 내뱉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듯 하늘을 메운 별들이 아마 그들의 위를 지나고 있을텐데 그마저도 즐길 틈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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