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갔다. 창을 넘어 소슬한 바람이 취기에 달은 분위기를 쓸며 코끝에 닿았다. 겨울이구나, 새삼 손을 비볐다. 속은 불이 붙은 마냥 뜨거운데 손과 잔은 계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평범한 어느 겨울이다. 친한 사람들끼리 오랜만에 모여 두런두런 말을 나누며 대작하는, 함께 지낸 일들이나 떨어져 보낸 사이의 일들을 나누며 추억을, 정을, 슬픔이나 기쁨 따위의 것들을 꺼내 보이는 평범한 날이었다. 내일 날이 새면 남을 사람과 떠나는 사람이 또 다음을 기약하며 등을 보일 터이니 그간의 회포를 풀고 또 앞으로 생길 것을 미리 풀며 서로 보듬는.
‘마들가리’는 제 뒷모습이 영영 걸음을 돌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혹은 그렇게 되길 원했다). 어쩌면 다음 만남 때에는 저의 부재를 누군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그는 그렇게 되길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점차 연락이 끊어지고 몇몇을 빼고는 어디 사는지 알 수 없게 될 때 즈음 가서는, 어렴풋이 ‘왜, 그런 용이 있지 않았던가. 기억 안 나?’하는 정도로만 회자되길, 그것이 그를 향한 유일한 제문이 되었으면 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짧은 앞머리가 드러내는 이마에 눈송이가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잠깐 차가웠던 우레는 곧 물방울로도 화化하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이지만 그는 이런 맥락의 것을 퍽 좋아했다). 옆에 둔 잔에 사박거리는 눈이 술과 손을 마주잡고 색을 풀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이상하게도 그 조그마한 액체의 움직임을 하나 둘 세면서, 그제야 속으로 모든 것을 온전하게 내려놓았다. …‘내려놓았다’라니, 스스로 정한 것을 언제부터 짐 취급을 했다고? 무의식중에 쓴 표현에 허탈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어쩌면 항상 속으로 생각하던 막연한 것이 다가와서 벌써, 이렇게 빨리? 라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기억하던 모습을 만들고 싶다는 것도, 연회에 참석한다는 것도 결국 핑계에 불과했나보다. 1년 반이나 먹어온 마음은 거의 햇수로2년을 꼬박 채우고서야 완전히 의지 앞에 배를 보였다.
안에서 웃고 떠드는, 내리는 눈발에 들뜬 사람들이 느껴진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채 그 모습, 소소한 습관, 나눈 대화들과 추억을 하나씩 꺼내 보드라운 손을 쓰다듬었다. 어디선가 낡은 상자가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눈을 감고, 상자의 것들을 하나씩 잡았다. 어떤 것은 따스했고, 어떤 것은 유독 조용했으며, 가끔은 발버둥치는 것도 있었다. 쉬이, 조금씩 달래며 그 모든 것을 하나씩 곱씹어 보았다. 언젠가 부모님이 그랬듯이, 누이가 그랬듯이, 이번에는 내가, 내 발로 떠나는 것이다. 정리할 시간이 있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가만히 앉아 묶인 기억들을 어루만졌다. 어느새 차곡차곡 속으로 삭이던 것들이 조금씩 힘이 빠지며 묶여있던 매듭을 풀었다. 길게 늘어진 끈은 곧 검은 바닥 어딘가에 닿아 스러질 것이다.
휘장처럼 드리워졌던 공포가, 두려움이 문을 열자 이상하게 마음이 후련했다. 떨던 손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몇 년은 묵었던 응어리가 천천히, 천천히 숨에 뱉어져 겨울바람을 타고 사라져간다. 한참을 더 꺼내고서야 속에 빈자리를 고동소리가 채우기 시작했다. 쿵, 쿵. 자리가 넓어진 마음을 무대삼아 큰 소리로 울렸다.
그리고
한 개가,
이제야 마주볼 용기가 생긴(혹은 가리고 있던 다른 불안들이 모두 사라진) 지금에서야 고개를 들었다. 보기 싫어서, 꺼낼 수 없어서 계속 파묻었던 것을 조심스레 올렸다.
…따스했다. 손을 대면 끔찍한 화마가 되어 오장을 다 태울 줄만 알았던 것이 이토록이나. 조각조각 나서 뿔뿔이 흩어졌던 사금파리가 얼기설기 붙어 그새 하나의 마음이 되어 버렸다. 실체가 되었다.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던, 나는 덧없이 사라지지 않겠노라고 애타게 울던 것이 해살같이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남은 건 없었다. 피할 것도, 가릴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등 뒤로 문이 열렸다.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자 자박, 자박,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속에서 꼭 쥔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차가워졌다. 이미 오래 전에 식은 술잔을 괜히 한번 건드리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온기를 주던 조각들이 심장 곳곳에 파편처럼 박힌 것만 같았다. 입을 열자 아까 사라진 줄만 알았던 끈들이 아지랑이처럼 일었다.
“여보게.”
“왜.”
“내가 말이야.”
그럼에도 차마 못 할 말이었다.
“…그대가 참한 처자랑 혼례를 한다고 하면, 꼭 납폐를 맡고 싶었소.”
“뭔 소리야.”
“거짓말일세.”
그런데도.
“내 그대에게만 귀띔을 하자면, 영영 산에 들어가 부지소종(不知所從)할 생각이네.”
“…거짓말은 안 한다더니.”
“이번엔 진실이오.”
그리 말하고는 습관처럼 눈을 꾹 감았다. 언제나처럼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다. 아니, 그래, 좋아. 앞이 보이는 자도 ‘눈 딱 감고 한다’는데, 어차피 앞도 못 보는 자가 무얼 그리 망설이는가? 마들가리는 세게 볼을 쳤다. 옆에서 가만히 하는 양을 지켜보던 유월이 그 소리에 물끄러미 보는 것이 느껴진다. 마들가리는 얼얼한 볼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답답하게 속에서 부피를 늘리던 것들이 그 간극을 놓치지 않고 입을 멋대로 움직였다.
“좋아하오. 내가 그대를, 좋아하고 있어. 뭐라 말을 꾸미려 해도 전부 남녀 간의 사랑을 속삭이는 밀어라 감히 이 혀에 담을 수가 없군.”
유독 빠르게 말을 쏟아내자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조각들이 파스스 흩어졌다. 개중 몇 개는 마모되던 끝이 티끌을 날렸다. 정말, 마지막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차마 못 했을 말들을.
“…알고 있소. 그대는 아직 어리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며 다양한 사람을 만날 걸세. 그러니, 꿈에 그리던 여자도 만나서 그대가 ‘가족’을 꾸리고 정착하길 바랄 뿐이네.”
미련을 남기기 싫다.
이 세상에, 누군가의 기억 속에조차 흔적을 남기기 싫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먼저, 그는 차가운 무덤가의 풀들을 떠올렸다. 항상 갈 적마다 등을 축축하게 대고 가만히 미리 잠들어보던 땅을.
그곳에 눕는 상상을 했다. 천천히 말라서 덮치는 수마에 쓸려 내려갈 것을 그려봤다. 가까워지는 역사의 모습에 두려움이 덮쳐도 도망칠 힘조차 없을 순간을 어렵지 않게 만들어냈다.
이상하게 그 자리에 남는 것이 있었다. 작은 마음이, 전하지 못한 조각들이. 남아서는 안 될 비석처럼 못 박혀 있었다. 악몽 끝에 종종 찾아와 위안을 주던 비석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유월이 이 마음을 받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안간힘을 써서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것을 풀었다.
작은 파문이 일렁였다.
저 아래 바닥에 닿는 소리가 간신히 났다.
“그대에게 언젠가는 형 소리가 듣고 싶기도 했는데, 역시 무리일 것 같소! 대답은 하지 않아도 괜찮네.
…혹시나 해서 말인데, 이 말 역시 진심이오.”
이 순간만은, 유월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자리를 오래 비웠으니 객客은 이만 들어가 보겠소이다.”
첫눈이 소복하게 쌓인 잔이 싸늘하게 손에 들어왔다. 눈은 아직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눈도 반드시 그칠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원했다.)
BGM : Marchen Waltz - Ser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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